유시민의 실체를 밝힌다
‘프락치’사건으로 둔갑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 <독립신문>은 지난 1984년 9월, 당시 서울대학
내에서 일부 학생들에 의해 시민이 불법감금 돼 폭행을 당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의 피해자
전기동(48·관악구청 녹지과 근무)씨를 만나봤다. 그는 20여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전씨는 "일부 언론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라며 "유 의원의 이 같은 미화 표현을 끝까지 바로 잡을 것"
이라고 밝히고, 조만간 이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 의원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학생들에 의해 당한 고문을 떠올리며 "나는 학생들에 의해 화장실로 끌려가 물이 담겨진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혔고 복도에 눕혀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는 물고문을 당하는 등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며 "죽기 직전에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쯤 사건에 가담한 한 학생이 '괜찮나'라는 말을 건넸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씨였고, 또 수사기록을 통해 유씨가 적극 가담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씨는 유 의원이 자신의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밝힌 약력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표현을 사용한데 대해, 지난 97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및 사과를 요구
했고 조정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과와 함께, 이 책을 폐기처분할 것을 명령했는데도 일부 언론에서는 아직도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전씨는 사건 당시 서울대에 논문자료를 받기 위해 법대교수를 찾았다가 서울대 학생들에게 끌려가 30여시간 감금, 물고문을 당하며 인권유린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신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아직도 무릎이 성치 않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현재 유시민 의원은 홈페이지 프로필 소개코너 '제가 저를 말합니다'에서 이 사건을 "유신과 5공화국 시절 포악한 권력에 대들다가 감옥에도 두 번 가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 또 지난 4.24 보선 국회의
원 출마공보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구속됐다"는 표현을 쓰는 등 이 사건을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은 지난 84년 당시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유시민씨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
이 서울대에서 학생 행세를 하고 있거나 볼일을 보러온 외부인 학생 4명을 정보기관에서 보낸 '프락치'라고 지목,
교내에 감금해 "당시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자백을 강요하며 이들에게 물고문을 비롯한 집단 구타를 가한 사건이다. 유시민씨는 이 혐의로 1심에서 1년 6개월을 받고 항소 후 2심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유 의원은 당시 항소문에서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 조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이라며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이 고조된 상태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전기동씨와의 일문일답이다.
-당시 사건 경위를 설명해 달라
"나는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사건 당일인 1984년 9월 26일 4시경, 나는 독도에 관한 리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법대 이상면 교수를 찾아가 관련도서를 추천받고 구내서점을 들려 나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학생 7여명이 몰려와 '잠깐 볼일이 있다'며 나를 무작정 학생회관 총학도 호국단(단장 백태웅)실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내 소지품을 뒤지다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대학생증을 확인하고는 '너 학원 프락치지?', '안기부
가 어디냐'라며 나를 정보원 프락치로 몰아갔다."
- 전씨는 “일부 언론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라며 “유 의원의 이 같은 미화 표현을 끝까지 바로 잡을 것”이라고 밝히고, 조만간 이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 의원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방송통신대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총학도 호국단과 같은 층에 있었던 서클연합회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으로 내 눈을 가리고 양손을 뒤로 묶고 주먹과 발길질로 내 온몸을 무수히 구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물고문도 당했다는데?
"그렇다. 내가 계속해서 자백을 거부하자 그들은 날 화장실로 끌고가 물을 채운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아 숨을 못 쉬게 했다. 또, 복도 시멘트 바닥에 눕혀놓고 여러 명이 내 팔다리를 붙잡고 재갈을 물리고 숟가락 등으로 강제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부었다. 물고문 뿐 아니라 날 앉혀놓고 양 무릎안쪽에 각목을 끼우고 위에서 밟는 등,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고문했다."
-당시 몸 상태는 어땠나?
"나는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앰뷸런스에 실려갈 때는 모든 게 흐릿했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신부전증'이라는 병도 얻었다."
-당시 유시민씨에 대한 기억은?
"난 감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몰랐다. 단, 내가 앰뷸런스에 실려 갈 무렵 한 학생이 '괜찮나?'라고 말을 건넨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씨였고 수사기록을 통해
‘프락치’사건으로 둔갑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 <독립신문>은 지난 1984년 9월, 당시 서울대학
내에서 일부 학생들에 의해 시민이 불법감금 돼 폭행을 당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의 피해자
전기동(48·관악구청 녹지과 근무)씨를 만나봤다. 그는 20여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전씨는 "일부 언론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라며 "유 의원의 이 같은 미화 표현을 끝까지 바로 잡을 것"
이라고 밝히고, 조만간 이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 의원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학생들에 의해 당한 고문을 떠올리며 "나는 학생들에 의해 화장실로 끌려가 물이 담겨진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혔고 복도에 눕혀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는 물고문을 당하는 등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며 "죽기 직전에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쯤 사건에 가담한 한 학생이 '괜찮나'라는 말을 건넸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씨였고, 또 수사기록을 통해 유씨가 적극 가담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씨는 유 의원이 자신의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밝힌 약력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표현을 사용한데 대해, 지난 97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및 사과를 요구
했고 조정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과와 함께, 이 책을 폐기처분할 것을 명령했는데도 일부 언론에서는 아직도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전씨는 사건 당시 서울대에 논문자료를 받기 위해 법대교수를 찾았다가 서울대 학생들에게 끌려가 30여시간 감금, 물고문을 당하며 인권유린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신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아직도 무릎이 성치 않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현재 유시민 의원은 홈페이지 프로필 소개코너 '제가 저를 말합니다'에서 이 사건을 "유신과 5공화국 시절 포악한 권력에 대들다가 감옥에도 두 번 가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 또 지난 4.24 보선 국회의
원 출마공보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구속됐다"는 표현을 쓰는 등 이 사건을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은 지난 84년 당시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유시민씨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
이 서울대에서 학생 행세를 하고 있거나 볼일을 보러온 외부인 학생 4명을 정보기관에서 보낸 '프락치'라고 지목,
교내에 감금해 "당시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자백을 강요하며 이들에게 물고문을 비롯한 집단 구타를 가한 사건이다. 유시민씨는 이 혐의로 1심에서 1년 6개월을 받고 항소 후 2심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유 의원은 당시 항소문에서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 조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이라며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이 고조된 상태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전기동씨와의 일문일답이다.
-당시 사건 경위를 설명해 달라
"나는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사건 당일인 1984년 9월 26일 4시경, 나는 독도에 관한 리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법대 이상면 교수를 찾아가 관련도서를 추천받고 구내서점을 들려 나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학생 7여명이 몰려와 '잠깐 볼일이 있다'며 나를 무작정 학생회관 총학도 호국단(단장 백태웅)실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내 소지품을 뒤지다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대학생증을 확인하고는 '너 학원 프락치지?', '안기부
가 어디냐'라며 나를 정보원 프락치로 몰아갔다."
- 전씨는 “일부 언론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라며 “유 의원의 이 같은 미화 표현을 끝까지 바로 잡을 것”이라고 밝히고, 조만간 이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 의원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방송통신대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총학도 호국단과 같은 층에 있었던 서클연합회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으로 내 눈을 가리고 양손을 뒤로 묶고 주먹과 발길질로 내 온몸을 무수히 구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물고문도 당했다는데?
"그렇다. 내가 계속해서 자백을 거부하자 그들은 날 화장실로 끌고가 물을 채운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아 숨을 못 쉬게 했다. 또, 복도 시멘트 바닥에 눕혀놓고 여러 명이 내 팔다리를 붙잡고 재갈을 물리고 숟가락 등으로 강제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부었다. 물고문 뿐 아니라 날 앉혀놓고 양 무릎안쪽에 각목을 끼우고 위에서 밟는 등,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고문했다."
-당시 몸 상태는 어땠나?
"나는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앰뷸런스에 실려갈 때는 모든 게 흐릿했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신부전증'이라는 병도 얻었다."
-당시 유시민씨에 대한 기억은?
"난 감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몰랐다. 단, 내가 앰뷸런스에 실려 갈 무렵 한 학생이 '괜찮나?'라고 말을 건넨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씨였고 수사기록을 통해
적극 가담했었다는 것도 알았다."
-다른 피해자들과는 연락을 하나?
"그들과 연락은 하지 않지만 소식은 알고 있다. 피해자 4명중 정용범씨는 그 때의 충격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과는 연락을 하나?
"그들과 연락은 하지 않지만 소식은 알고 있다. 피해자 4명중 정용범씨는 그 때의 충격 때문에
정신병자가 됐다. 지금 장가도 못가고 완전히 폐인이 돼버렸다."
-그 후에도 이와 관련된 일로 법적 대응을 했다는데….
"유시민씨는 출감 후 책을 몇 권 냈는데 그 중 「아침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약력을
-그 후에도 이와 관련된 일로 법적 대응을 했다는데….
"유시민씨는 출감 후 책을 몇 권 냈는데 그 중 「아침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약력을
소개하며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고 밝히고 책 본문에서도 이런 표현을 무수히 많이 썼다.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다. 나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및 사과를 요구했고 조정위원회에서 사과와 폐기처분 명령을 내려 피고
'학민사' 대표와 유시민씨는 원고인 나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는 언론을 통해서나 지난 4.24 국회의원 보궐 선거 출마시에도 마치 사회를 위해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는 언론을 통해서나 지난 4.24 국회의원 보궐 선거 출마시에도 마치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인양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미화하며 왜곡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몇
차례나 언론중재위원회를 찾아다니며 바로잡아 가고 있다."
그는 실제로 지난 3월, 경향신문의 3월 12일자 17면 '검사들 특권의식 ·오만으로 범벅' 제하의 유시민씨
그는 실제로 지난 3월, 경향신문의 3월 12일자 17면 '검사들 특권의식 ·오만으로 범벅' 제하의 유시민씨
관련기사에서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표기를 지적,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서를 제출해
경향신문으로부터 정정보도를 이끌어냈다. (편집자 주)
-현재 유시민 의원에 대한 생각은?
"그는 원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크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나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책으로
-현재 유시민 의원에 대한 생각은?
"그는 원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크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나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시민씨의 과거 죄상을 밝힐 것이다. 그의 거짓과 가식의 삶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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